트온 블트IF
2025-11-16 11:02

생의 많은 일이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레인 시어는 여러 차례 체감했겠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그랬을까? 끝내?

 언젠가 그는 미덴에서 죽어줄 생각 따위 없다고 말했다. 오래전 숨을 잃은 지 한참 된 말은 한없이 덧없어졌다. 바람 앞의 먼지처럼. 그리고 먼지가 흩어진 자리에는 이름대로 새까만 트리거가 하나 남았다.

 그가 남긴 블랙 트리거는 엄중하게 보관되었다. 보안을 위해 연구 개발실의 견고한 금고 안에 모셔지다시피 했고, 도리어 생전보다 깍듯하고 신중한 대우를 받는 듯했다. 대원은 물론이고 개발실, 수뇌부조차 그것을 함부로 볼 수 없었고 정보까지 통제되었다. 그와 면식이 있던 민간인과 일반 대원들은 그가 영국으로 급히 돌아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이상으로 친분이 있던 특수한 몇몇 대원들은 부고를 들었다. 장례는 그들의 방식으로 라이브스에서 치러질 것이며 조문을 갈 수 있을지는 그들의 결정에 달려있다 하여 객지에서는 감정을 내색할 수조차 없었다. 단순히 상실을 입에 담고 슬픔을 표현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버거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마츠요이 히코는 아니었지만. 부고를 듣고 히코는 “그래?” …라고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와 빤히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약간의 불신이 묻어 있었다. 본인 안에 자리한 어떠한 확신과 이 부고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고, “알았어.” 히코는 집으로 돌아갔다. 둘이서 지내기에는 좁아졌다는 이유로 이사해 여분의 방이 있고, 침대는 두 개나 놓였지만 이제는 넓어진 집으로.

 에우로파를 통해 결코 듣고 싶지 않았을 비보를 전해 들은 라이브스에서는 곧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현관문은 어느 날 갑작스레 열렸다. 바깥에서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어락이 내는 경쾌한 기계음이 나고서야 문을 돌아본 히코는 아스란과 눈을 마주쳤다. 아스란이 트리온체로 좁은 현관에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스란이잖아. 무슨 일이야?”

 “히코. 오랜만이네요.” 두 사람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또 그만큼 친밀했던 것처럼 거리감 없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히코가 누웠던 몸을 일으키자, 아스란은 내부를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야, 레인의 물건을 가지러 왔죠.”

 “아, 그래.” 느리게 닫히던 현관문이 이제야 소리를 냈다.

 “히코가 함께 지냈었다고 했죠? 미덴의 물건은 잘 구별이 되지 않네요. 도와줄래요?”

 “그러지 뭐.”

 흔쾌히 대답한 히코는 현관까지 나가 아스란을 이끌며 하나하나 레인의 물건을 설명했다. “이거랑 이건 레인 신발이야.” 현관 옆에 붙은 작은 방 앞에서는 내부가 보이도록 비스듬히 서서 불을 켰다. 옷장과 옷걸이에 걸린 옷과 잡다한 물건들이 빛을 받고 상황에 맞지 않는 다양한 색을 자랑했다. “여기서 저쪽에 걸린 건 다 레인 옷.” 아스란은 문턱을 밟고 서서 손에 닿는 옷가지를 손으로 쓸어보며 잠시 말을 아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여러분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미덴의 옷은 낯설게 생겼네요.” 그런가? 라이브스의 의복을 떠올리며 히코는 부엌으로 향했다. 소분된 조미료와 전자레인지 근처에 정리된 레토르트 식품들, 물기가 마른 채 엎어진 식기들. “이거는 같이 쓰던 건데.” “없어도 괜찮겠어요.” 아스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히코는 바로 거실과 통하는 미닫이문을 완전히 열었다. 책상이며 침대가 놓여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던 공간이었기에 히코도 설명할 말이 많아졌다. “그건 레인이 받았던 인형이야. 엔코우 닮았다고.” “어머.” “이건 리이사가 레인 생일에 준 선물.” “투명해라. 아름답네요.” “그것도 선물로 받았다고 했어. 머리를 묶는 데 쓰는 거야.” “참, 묶을 수 있는 길이가 됐었죠.” 많아도 너무 많아서 히코는 한참을 혼자, 얼핏 소리만 들어서는 신난 사람처럼 끊임없이 말을 이어야 했다. 아스란은 히코의 모든 말마다 짧게 감상을 말하며 금세 물건의 필요를 판단했다. 말에 담긴 성의도, 단호하고 빠른 결정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반복하자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설명하게 된 물건은, 레인의 책상에 놓인 틴케이스였다. “그건 레인이 모아뒀던 사진들.” 아스란은 레인이 미덴의 친구들을 추억하기 위해 남겼던 사진들을, 추억의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을 아이러니를 한 장씩 빠르지 않게 살폈다. “… 히코도 있네요.” 몇 가지 물건들은 보더 측의 호의로 추후 건네받을 모양인지, 아스란은 틴케이스와 스톰 글라스 같은 몇 가지 가벼운 물건들만 챙겼다.

 “고마워요. 히코,”

 “가져가는 거야?”

 히코는 곧 돌아가려 마지막 인사를 꺼내려던 아스란의 말허리를 잘랐다. 시선에는 부고 앞에서의 불신이 아닌 확신이 담겼다. 레인이… 그냥은 죽을 리 없다는 확신. 목적어가 없어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했지만, 아스란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신경 쓰이나요?”

 “별로.”

 “후후, 그래요? 의외네요.”

 “의외라. 레인이 썼던 편지 때문에 그래?” 이번에는 대답 없이 웃던 아스란이 입가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히코, 잠시 함께 갈래요?” 마찬가지로 ‘어디로’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히코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란은 곧 어딘가에 연락하는 듯 침묵을 지켰고, 잠시 후 두 사람 앞에는 칠흑같이 어두워 한 치도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게이트가 생겨났다. “가요.” 목적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히코는 징계에 대해서는 떠올리지도 않았지만, 떠올렸다 해도 망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응.”

 보더 역시 이 일을 묵인할 것이다. 외교적인 특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친구를 진정으로 애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라이브스에는 이전과 같은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통에 잠겨 있지도 않았다. 감정을 추스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이고, 대화를 나누고, 저마다의 일을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축복의 비가 얼굴을 적셔도 눈가의 물기를 감출 수단이 되어, 웃음만을 잃었을 뿐. 히코는 지구의 비가 오는 날을 떠올렸다.

 아스란도 그들 중 한 사람으로 돌아간 듯,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장례는 이미 치렀어요.”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일은 장례와는… 레인과는 무관한 일이에요.” 히코는 자연스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은 의아한 듯 이방인을 바라보다가도, 아스란의 표정을 보고서는 히코의 뒤를 따라 함께 걸었다. 어떠한 의식처럼, 점점 사람이 불어나 주변을 감싸는 와중에도 아스란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레인을 떠올리고 말겠죠.” 곧 히코가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을 타이르는 말처럼 목소리에 분명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건 그 애가 남긴 거니까.”

 곧 뒤를 돌아 펼쳐 보인 아스란의 왼손바닥에는 새까만 꽃잎이 두 장 포개어진 형태의 낯선 트리거가 놓여 있었다.

 동시에 발소리가 모두 멎고, 사람들이 침음을 삼키며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빗방울만이 블랙 트리거를 어루만졌다.

 히코는 그 순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에 물리적인 힘이 담긴다면 누구도 그것에 손을 뻗을 수 없게 막았을 것처럼. 이다음 순간, 이들이 저것을 쥐고 기동하는 모습은 보지 않으려는 듯이.